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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역사

이익상목사의 유물과 함께보는 성경과 역사

성경과 역사 17

벳 쉐아림 5번 석관

벳 쉐아림 5번 석관 (Catacomb No.20 Sarcophagus No.5)

벳 쉐아림 5번 석관 (Catacomb No.20 Sarcophagus No.5)

바리새파니, 사두개파니 하는 것은 같은 철학, 같은 정치 이념, 같은 신앙관들을 공유하는 이들이 모인 복잡한 이익 공동체의 이름입니다. 이 둘은 유대 공동체 안에서 늘 충돌했습니다.

사두개는 ‘사독’이라는 말이고, 사두개파는 사독계열 제사장의 권위를 따르고 그들의 가르침과 신념을 지지하는 사람들인데요. 많은 제사장들이 사두개파 공동체에 속해 있기는 하였지만, 모든 제사장이 사두개파인 것은 아닙니다.

사두개파에 비해서 바리새파는 매우 대중적인 지지를 받고 있던 공동체였습니다. 그래서 사두개파에 비해서 바리새파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사두개파 사람들은 성전을 중심으로 세력을 구축했지만, 바리새파는 회당을 중심으로 영향력을 키워나갔습니다. 회당에서 드리는 기도와 예배, 그리고 회당에서 치루어지는 거룩한 의식들은 모두 바리새파 사람들의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바리새파의 가르침은 유대 공동체의 말초신경 끝까지 영향을 미쳤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경제적인 면에 있어서 사두개파는 부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유대 공동체에서 높은 관직에 있었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 공동체를 구성하는 사람들이 유대 공동체에서 최고의 권력층이라고 말할 수 있는 제사장들의 주축을 이루었기 때문에 이 권력을 나누어 가지기 위해서 재력이 있고,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사두개파에 모여들었던 거지요. 그래서였을까요? 1세기에 활동했던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사두개파 사람들이 권위적이고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무례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바리새파는 이런 신분적인 특징이 없습니다. 제사장으로부터 시작해서 시골 마을의 농부와 어부들까지 회당을 중심으로 기도하고 예배드리는 모든 이들이 잠재적으로 바리새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두개파와 비교해 보건데, 바리새파 사람들은 사회적인 신분이 다양하고, 경제적인 능력 또한 특징 지을 수 없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사두개파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신앙과 삶의 기준은 ‘오직’ 모세 오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파는 오경과 함께 ‘조상들의 전통’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이 ‘조상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어떻게 해석하는지를 알려주는 교사들이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이들을 ‘랍비’라고 불렀습니다.

스가랴가 죽고 난 후에는 이런 웃시야를 막을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 막을 수 없는 권력을 향한 욕구는 정치 뿐 아니라, 종교의 영역까지 넘보기 시작했습니다. 제사장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성소에 들어가 제사장이 아니라, 자기가 직접 분향단에 분향을 하려고 했거든요.

하나님의 법을 아는 제사장 아사랴를 대표로 팔십 명의 제사장들이 웃시야를 말렸는데도, 기어코 성소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막 분향을 하려고 할때, 악성 피부병이 온 몸에 생기게 되었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성소에 부정한 사람이 들어오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되었습니다. 권력과 힘, 그리고 군사력을 가지고 있는 왕이기에 성소에 들어오는 것을 말리기는 하였지만, 강제하지 못했던 제사장들이 웃시야의 이마에 악성 피부병이 생기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서는 황급히 성소에서 그를 쫓아냈습니다.

웃시야는 죽지 않았기에 죽는 날까지 ‘왕’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는 하였지만, 죽는 날까지 악성 종기(또는 나병)에 고통받았습니다.

부정한 사람이기에 하나님의 성전을 드나들 수도 없었습니다. 악성 피부병 환자들은 가족과 공동체로부터 격리되어야 했기 때문에, 예루살렘의 왕궁이 아닌, 성밖에 있는 별궁에 격리되어 여생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가 죽은 후에 어디에 장사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열왕기를 기록한 역사가와 역대기를 기록한 역사가의 기록이 서로 다릅니다. 열왕기를 기록한 역사가는 웃시야를 그의 조상들과 함께 다윗성에 장사지냈다고 기록하였습니다만,

(왕하 15:7) 역대기를 기록한 역사가는 왕실의 묘지에 장사지내지 않고, 예루살렘 바깥 변두리 땅에 장사되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럼, 누구의 기록이 맞다는 걸까요? 아쉽게도 아직까지는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만, 정결하지 않은 사람은 예루살렘 성 안에 들일 수 없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의 성밖, 성과 마주보는 기드론 골짜기 건너편 어디엔가 묻혔을 것이라는 주장이 설득력 있어 보입니다.

1931년에 히브리대학교의 고고학자인 수케닉(Sukenik) 교수가 예루살렘을 마주보는 감람산의 러시아 정교회 수도원의 유물 전시실에서 가로와 세로가 각각 35cm 정도가 되는 납작한 대리석 판을 보았습니다. 1865~1894년 사이에 감람산에 러시아 정교가 땅을 구입하면서 수도원을 짓고, 그곳에 작은 박물관을 만든 후, 앤토닌(Archimandrite Antonin)이 그곳에 전시할 물품들을 사들이는 과정에서 사들인 대리석 판입니다.

이 판은 무덤의 입구에 붙어 있어서 무덤의 주인을 알려주면서 동시에, 무덤을 함부로 열지 못하도록 경고하는 용도로 제작된 것이거나, 사람의 뼈를 보관하는 뼈 상자의 일부일 수도 있습니다.

그 판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이곳으로 가져왔다/웃시야의 뼈/유다의 왕/열지 마시오.”

대리석 판에 쓰여진 글씨체의 특징으로 보아서 웃시야가 죽고 대략 700~750년 뒤(대략 30~70CE 사이)에 사람들이 웃시야의 묘를 보존하거나, 그의 뼈를 보존하기 위해서 이 글귀를 새겼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그렇다면, 이 판이 발견된 장소만 알면 열왕기와 역대기 중, 누구의 기록이 더 정확한지를 알수 있을 텐데요. 너무나 아쉽게도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그 고고학 유물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유물 편람이 분실되는 바람에, 정확하게 어디에서 발굴되었는지, 누가 발굴했는지를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아쉽지만, 또 한편으로는 기대가 됩니다. 어느 곳에서 어떤 유물이 성경의 기록을 역사로 확증하고, 성경을 읽는 성도들의 궁금증들을 풀어줄 지.

그 때가 되면, 웃시야의 무덤도 찾을 수 있게 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