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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순례 이야기

이익상목사와 함께하는 이스라엘 성지순례 이야기

성지순례 이야기 8

성묘교회

골고다 언덕 - 예루살렘 성의 서쪽벽에 있는 성문을 나오자마자 우편에 있는 버려진 채석장이다. 예수님 당시 성문은 현재 루터란 교회에 남아있다.(빨간색 원형 점선안이 골고다 언덕)

골고다 언덕 - 예루살렘 성의 서쪽벽에 있는 성문을 나오자마자 우편에 있는 버려진 채석장이다. 예수님 당시 성문은 현재 루터란 교회에 남아있다.(빨간색 원형 점선안이 골고다 언덕)


“골고다 즉 해골의 곳이라는 곳에 이르러,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하지 아니하시더라.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뽑아 나누고 거기 앉아 지키더라. 그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를 붙였더라”(마태복음 27:33-37)
성묘교회 바닥도면

성묘교회 바닥도면

예루살렘에서 기독교인들이 가장 거룩하게 생각하는 곳이라면, 단연 성묘교회(The Church of the Holy Sepulchre)를 꼽을 것입니다. 지금 뿐 아니라, 천년 전에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십자군 시대에 예루살렘을 통치하던 예루살렘 왕은 살아생전에 스스로를 “왕”이라고 단 한번도 말한 적이 없었습니다. 대신 “성묘교회의 수호자”라고 불렀지요.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골고다 언덕 위에 세워진 교회는 늘 전세계에서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고자 찾아온 순례객들로 북적입니다. 그렇지만 정작 골고다 언덕 위에 세워진 성묘교회에 도착하면, 좀 당황스럽기도합니다. 옛 골고다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골고다의 바위 위에 세워진 육중한 교회가 바위 언덕 위에 턱허니 놓여진 것이, 예수님 당시의 바위 언덕의 모습이라곤 유리에 뒤덮혀 조금 밖에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골고다 돌 - 예수님 당시의 골고다 언덕의 돌

골고다 돌 - 예수님 당시의 골고다 언덕의 돌

예수님의 십자가가 세워졌던 골고다는 헤롯대왕이 예루살렘 성을 쌓으면서 필요했던 돌을 뜨던 채석장이었습니다. 버려진 채석장의 한 바위언덕을 십자가 처형장으로 사용했는데,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성으로부터 저 멀리 떨어진 어느 곳이 아니라, 성문을 나오자마자 바로 있었던, 그야말로 사람들이 오가는 길 옆이었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빈번히 다니는 예루살렘의 서쪽 성문 옆을 사형장으로 사용한 이유는 출입하는 사람들이 십자가에 매달린 사형수들을 보면서 경각심을 갖게 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매달린 사람에게도 수치심을 주기 위해서 일반적으로 십자가는 높지 않았습니다. 약 2미터 내외였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사람은 보통 빨리 죽지 않는데, 매달려 있는 동안 지나가는 사람들과 눈이 마주친다면, 얼마나 창피하고 무안했을까요. 내가 아는 사람이라면 더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니 골고다 언덕이라고 하지만, 그 언덕의 높이(대략 4미터)가 그리 높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골고다 언덕은 초대 기독교인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장소였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사형장인 그 장소는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기독교인들이 너도나도 찾아와 순례를 하는 성지가 되어버렸습니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로마 황제 하드리안(117-138년 재위)은 바르 코흐바의 항쟁(132-135년) 이후에 골고다 위에 아프로디테를 위한 신전을 건설합니다. 이방의 성소가 되어버린 골고다 언덕은 콘스탄틴 황제에 이르러서야 건물로써의 교회가 세워집니다. 콘스탄틴은 기독교를 용인하고(313년), 그후 십여년이 지나 325/6년에 아프로디테 신전을 해체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성묘교회를 건설하게 된 것이 현재 성묘교회 건물 역사의 시작입니다.

콘스탄틴이 성묘교회를 건설하면서 두개의 거룩한 장소를 하나의 건물에 담아냈는데요. 하나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골고다 언덕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무덤이었습니다. 614년에 페르시아의 침공 때, 교회가 일부 소실되기는 했지만, 630년에 다시 복원되었고, 1027/8년 이슬람의 파티미드 왕조 때 완전 파괴되었다가, 곧 20년 뒤에 재건되는 흥망성쇠의 역사를 반복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성지순례객들이 보는 성묘교회의 외양은 십자군 시대에 완성된 모습이라고 말해도 될 듯합니다.

그러나 그 골고다 위에 교회가 섰다고 마냥 좋아할 일만은 아닙니다. 이슬람 사람들의 지배 아래에서도 성묘교회는 누구의 소유라기보다는 모든 기독교인들의 것이었습니다.

물론 다양한 종파의 기독교 사제들과 수도자들이 한 지붕 아래에 있었으나, 그렇다고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누구의 것이라고 말하는 이는 없었습니다. 그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이시니까요.

성묘교회 마당 - 입구 중에 입구 위에는 벌써 150년째 치워지지 않은 사다리가 있다. 저 사다리는 1852년에 처음 기록에 등장하는데, 저 구역이 어느 종파의 구역인지, 그리고 누가 저 사다리를 가져다 놓았는지 모르기 때문에 어느 종파의 사람도 저 사다리를 옮길 수 없다.(빨간 원형 점선 안 - 창문 아랫쪽 사다리)

성묘교회 마당 - 입구 중에 입구 위에는 벌써 150년째 치워지지 않은 사다리가 있다. 저 사다리는 1852년에 처음 기록에 등장하는데, 저 구역이 어느 종파의 구역인지, 그리고 누가 저 사다리를 가져다 놓았는지 모르기 때문에 어느 종파의 사람도 저 사다리를 옮길 수 없다.(빨간 원형 점선 안 - 창문 아랫쪽 사다리)

이 평화는 1853년에 깨져버립니다. 교회들이 거룩한 장소들에 대한 자기들의 소유권을 주장하고,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술탄이 이를 승인했습니다. 이미 몇 세기를 거쳐 그곳에서 터를 잡고 있던 그리스 정교회, 아르메니아 정교회, 로마 카톨릭 교회는 보다 넓고 중요한 장소들을 차지하였고, 뒤늦게 그곳에서 예배를 드리던 시리아 정교회, 이집트 곱틱교회, 에티오피아 정교회는 작은 구역을 관리하게 된 것입니다.

그 후로 성묘교회는 거룩한 장소이자, 불안한 평화가 줄타기를 하는 장소가 되어버렸습니다. 서로 자리를 차지한 종파들이 자기들의 예배처소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서로 정해진 예배시간이나 청소 공간을 조금만이라도 엇나가거나, 심지어 타종파의 사제가 자기의 구역을 들어오는 것조차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곱틱 교회의 성직자가 성묘교회의 옥상 쪽 자기 구역의 의자에 앉았다가 여름의 뜨거운 햇빛을 피하기 위해 의자를 20cm 정도 조금 옆으로 그늘 쪽으로 옮겨 앉은 곳이 에티오피아 정교회의 구역이어서 두 종파간 성직자들의 충돌로 11명이 병원에 후송되었고, 2008년도에는 그리스 정교회의 사제들과 아르메니아 정교회 사제들이 예배 시간과 관련된 충돌로 집단폭력이 있었던 것은 이제 유명한 이야기가 되어서 유튜브에서 까지 찾아볼 수 있을 정도입니다.

성묘교회를 찾을 때마다 제 마음은 너무 불편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안에서 위안을 얻을 수 있는 것은 비어 있는 예수님의 무덤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고, 승천하셨으며, 다시 오실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그날 골고다를 찾으시고 뭐라고 말씀하실지 너무나 궁금하고 두렵습니다. 주님은 종으로 오셨는데, 우리는 주인이 되려하고 있고, 주님은 심지어 그분의 생명마저 우리에게 나누어 주셨는데, 우리는 가지려고만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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