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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순례 이야기

이익상목사와 함께하는 이스라엘 성지순례 이야기

성지순례 이야기 10

헤브론

헤롯대왕이 막벨라 굴 위에 건설한 거대한 건물 - 건물에는 여섯개의 커다란 돌이 있는데, 아브라함, 사라, 이삭, 리브가, 야곱, 레아의 무덤을 기념하고 있다.

헤롯대왕이 막벨라 굴 위에 건설한 거대한 건물 - 건물에는 여섯개의 커다란 돌이 있는데, 아브라함, 사라, 이삭, 리브가, 야곱, 레아의 무덤을 기념하고 있다.


가로 61m, 세로 36m, 높이 15m의 육면체의 건물은 아브라함이 사라의 죽음을 슬퍼하며, 사라를 매장할 무덤으로, 그리고 아브라함과 그 가족들이 사용할 무덤으로 에브론으로부터 구입한 막벨라 굴 위에 서 있습니다.(창세기 23장)

헤롯 대왕이 헤브론에 건설한 웅장한 건물이 있는 곳은 2,0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유대인들에게 가장 중요하고 거룩한 땅 중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가로 61m, 세로 36m, 높이 15m의 육면체의 건물은 아브라함이 사라의 죽음을 슬퍼하며 사라를 매장할 무덤으로, 그리고 아브라함과 그 가족들이 사용할 무덤으로 에브론으로부터 구입한 막벨라 굴 위에 서 있습니다.(창세기 23장)

지금도 그 건물에는 막벨라 굴에 장사된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 이삭과 그의 아내 리브가, 야곱과 그의 아내 레아를 기념하는 큰 돌들이 나란히 누워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전통적인 매장 방식은 가족묘입니다. 죽음을 맞이한 사람을 세마포에 잘 싸서 동굴 무덤에 안치하고 나면 2~3년 뒤에는 세마포와 함께 시신은 모두 썩고 뼈만 남게 됩니다. 그러면 그 뼈들을 잘 수습해서 동굴 무덤의 한쪽에 쌓아 놓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할아버지의 뼈와 아들의 뼈가, 아버지의 뼈와 어머니의 뼈가, 그리고 손자들의 뼈가 함께 뒤엉켜 쌓이게 되겠지요.


막벨라 동굴로 들어가는 입구 - 현재는 이슬람 사원에서 관리하고 있다.

막벨라 동굴로 들어가는 입구 - 현재는 이슬람 사원에서 관리하고 있다.

이런 매장 방식은 유목 방식의 생활 풍습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날씨가 더운 광야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시신의 부패가 빠르기 때문에 해가 떨어지기 전에 매장을 합니다. 집에서 죽음을 맞이했을 경우는 집 주변 가족들의 매장지로 사용하는 동굴 무덤에 매장할 수 있지만, 집을 떠나 하루 거리 이상의 장소에서 목축을 하던 중 죽음을 맞이하면 해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와 가족의 동굴무덤에 매장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죽음을 맞이한 장소에서 급하게 임시로 매장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성의 없이 대충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내 가족의 시신이 광야의 동물들에게 훼손되지 않게 해야 하기 때문에, 제일 먼저 주변에서 시신을 안전하게 보호할 만한 동굴을 찾습니다.

일단 바위 굴이나, 그 비슷한 것이 있다면 그곳에 안치하고, 그 입구를 돌로 막아서 동물들이 시신을 훼손하지 못하게 합니다. 동굴이 없는 평지에서는 시신 위에 돌을 차곡차곡 쌓아 놓습니다. 동물들이 부패하는 시신의 냄새를 맡고 돌을 흩어버지리 못하도록 꼼꼼하고 튼튼하게 잘 쌓는 것입니다. 이렇게 급하게 매장된 시신 역시 2~3년 뒤면 뼈만 남고 모두 흙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그러면 양을 치러 나갔다가 그 유골들을 수습해서 가족 묘로 사용되는 동굴로 옮기는 것입니다. 결국 타지에서 죽음을 맞이해서 급하게 매장되었으나, 시간이 지나 다시 가족들 곁으로 돌아가는 거지요. 성경은 이렇게 죽음 뒤에 그 주검이 선조들이나 가족들 곁으로 돌아가는 가족 무덤의 매장 방식에 근거해서 왕들의 죽음을 이야기할 때 “열조와 함께 자다”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합니다.(열왕기 27번, 역대기 11번) 선조들과 함께 한 동굴 무덤에 누웠다는 표현입니다.

헤브론은 1900년대 초까지 다수의 이슬람 사람들과 상대적으로 소수인 유대인들 약 1만 명이 평화롭게 섞여 살던 도시였습니다. 그러다가 1917년 영국이 이스라엘 땅을 식민통치를 시작하면서 점차 이 조용한 도시가 거룩한 도시로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고, 헤브론에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들 가운데에는 이슬람 사람들도 있었고, 유대인들도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유대교인들의 성장세가 이슬람의 성장세보다 급격히 많아지자, 이들 간에 긴장감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때까지 이슬람 사람들의 수보다 적었음에도, 이슬람 원리주의자들과 급진주의자들은 늘어나는 유대인들의 수가 매우 불안했던 모양입니다. 급기야 1929년에 회당에서 예배를 드리던 67명의 유대인들을 이슬람 과격주의자들이 학살을 하면서 헤브론에서 지켜지던 아랍인들과 유대인들 사이의 평화가 깨졌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땅을 실효 지배하던 영국은 회당 마을에 살던 750여명의 유대인들의 안전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이들 모두를 헤브론 밖 다른 지역으로 강제 이주 시켰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헤브론 전역에 살던 유대인들을 강제 이주시키기 시작했습니다. 800년 넘게 그 땅을 지키며 살던 유대인들은 식민통치 시대에는 영국군에 의해, 그리고 1950년 이후에는 헤브론을 실효 지배하던 요르단에 의해 헤브론에서 강제 추방을 당했습니다.

막벨라는 1994년 이래로 이슬람 모스크 구역과 유대인 회당 구역으로 나뉘어져 관리된다 - 일년에 열흘간 이 두 구역의 장벽이 열리는 것을 제외하고는 안전의 문제로 이 두 구역은 철저하게 분리된다.

막벨라는 1994년 이래로 이슬람 모스크 구역과 유대인 회당 구역으로 나뉘어져 관리된다 - 일년에 열흘간 이 두 구역의 장벽이 열리는 것을 제외하고는 안전의 문제로 이 두 구역은 철저하게 분리된다.

헤브론에 다시 유대인들이 정착하게 된 것은 1967년 6일 전쟁 이후입니다. 이스라엘이 요르단을 몰아내고 헤브론을 수복하면서, 헤브론에 살았던 옛 유대인들이 땅과 건물을 몰수 당했던 지역으로 다시 돌아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현재 20만 명의 거대 도시가 된 헤브론에는 약 800여 명의 유대인들이 살고 있습니다. 이들은 생명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무장을 한 채 그 땅을 지켜나아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입니다. 그곳에 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장사된 막벨라가 있기 때문입니다.

막벨라는 단지 오래된 무덤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신앙의 유산이자,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나님이 가라고 하신 땅인 가나안에 정착한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의 정체성, 그 자체입니다. 이 곳에 살고 있는 이유를 아브라함에게서 찾고 있는 유대인들에게는 아브라함과 그 자손인 자신들에게 허락하신 복의 증거가 헤브론의 막벨라 굴입니다. 나라를 잃고 떠돌아다니던 유대인들이 시온에 대한 꿈을 그릴 때, 그 희망의 토대가 바로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고, 그 약속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곳이 막벨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적인 입장에서의 옳고 그름을 떠나 죽음을 무릎쓰고서라도 그 곳을 지켜 나가는 것입니다. 단 한 명이 살아남더라도, 그 한 명이 아브라함의 약속을 이어가리라는 믿음이 그들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면, 시대가 지나도 변하지 않는 믿음의 토대를 남긴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순교의 순간에도 흔들리지 않던 신앙의 선배가 남겨놓은 그 거룩한 토대 위에 한국교회가 서 있는 것처럼, 오늘 우리의 교회는 장래의 세대를 위해서 어떤 기초를 다지고 있는지 진심으로 곰곰히 되새겨 봐야 하겠습니다.

헤브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