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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림의강단

은혜를 누리는 삶

2020년 8월 9일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고린도후서 6장 2절)

하버드 대학의 생물학자이자 개미 전문가인 에드워드 윌슨(Edward Wilson)은 자신의 개미 연구를 통해 흥미로운 사실을 보여줍니다. 개미집 안에 개미가 죽어 있어도, 다른 개미들이 이 사실을 아는데 며칠씩 걸린다는 것입니다. 개미는 시각이나 청각이 아닌 후각을 통해 죽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개미가 죽어 부패하게 되면 ‘올레산’이라는 화학물질이 나오게 되는데, 이 냄새를 맡고 나서야 개미들은 동료 개미의 죽음을 알고, 개미를 무덤으로 끌어냅니다. 개미들은 다른 냄새에 대해서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지만, 올레산에는 민감하게 반응하며 죽음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살아있는 개미에 올레산을 묻혀봤더니, 다른 개미들이 죽었다고 인식하고 개미 무덤으로 끌고 갔을 뿐만 아니라, 그 개미들은 자기의 몸에서 나는 냄새를 깨끗하게 닦아내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롬 6:11-12)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안에 있으니, 그 은혜 안에 거하며 사는 자가 되고 더 이상 썩게 될 몸의 사욕을 따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올레산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시체를 처리하는 개미들처럼, 은혜와 죄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여 죄의 요소는 단호하게 제하여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려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은혜 안에 거할 수 있게 될까요? 바울은 본문의 말씀을 통해 영적인 도전과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시온 챌린지 아이들 만나길 바라는 예수님 마음 담아

요한복음 20장 24~29절
24.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 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손을 그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26. 여드레 를지나서제자들이다시집안에있 을때에도마도함께있고문들이닫 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 다하시고27.도마에게이르시되네 손가락을이리내밀어내손을보고 네손을내밀어내옆구리에넣어보라 그리하여 믿음없는자가되지말 고믿는자가되라28.도마가대답 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9. 예수께서 이 르시되너는나를본고로믿느냐보 지못하고믿는자들은복되도다하 시니라다.

  • 광림교회 담임목사 김 정 석
    kwanglim-sp@hanmail.net
첫째, 내가 누구인지를 바르게 인식할 때 은혜가 임합니다.

본문 2절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이미 은혜와 구원을 베푸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어진 은혜를 누리기 위해서는 받는 자의 태도가 중요합니다. 바로 내가 누구인지 인식할 때, 은혜가 임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사람’이라 불리는 토레이(R. A. Torrey) 목사님의 일화입니다. 한 여인이 목사님을 찾아와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잘 되지 않는다’며 상담을 요청했습니다. 목사님은 “나 자신을 바르게 알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말을 따라 기도했을 때 여인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추하고 더럽고 악한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여인은 목사님을 다시 찾아가 “이제는 너무 창피해서 살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십자가의 은혜를 알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그 말을 따라 기도하자 여인은 자신을 위해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을 깊이 만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자신을 발견하고서 십자가를 바라보게 되니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얼마나 큰지 비로소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단순히 지식의 차원을 뛰어넘어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처절하게 느끼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인식이 고백되어지고, 두려운 마음을 갖고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그 때 진정으로 십자가를 바라보게 되며, 십자가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 믿음의 고백과 경험이 우리의 심령 가운데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둘째, 은혜는 나를 새롭게 합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에게는 어떠한 변화가 나타납니까? 은혜 안에 있는 자에게 나타나는 가장 중요한 특징은 ‘감사와 만족’입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살아있는 자요 징계를 받은 자 같으나 죽음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다른 사람을 부요케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9~10절)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삶이 겉으로는 부족해보이거나 부정적으로 보일지라도, 은혜 안에 있는 사람은 그 상황을 뒤집어 버리고 만족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부정을 긍정으로 바꾸는 능력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나의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이며, 날마다 새롭게 하는 힘입니다.

물론 우리 스스로도 날마다 변화를 추구합니다. 우리의 외형과 내형을 바꿔보려고 부단히 노력해봅니다. 하지만 그 변화가 오래 가지 않는다는 것을, 유한하고 연약한 인간에게는 그러한 노력에도 한계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 인생과 생명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에게는 우리를 변화시키는 참된 능력이 있으십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능력과 은혜 안에서 매일매일 새롭게 하는 역사를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일하실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내어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비움’이 있을 때 ‘채우심’의 역사가 있습니다. 날마다 나를 비워내어 새로움을 더하시는 은혜의 능력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은혜는 새로운 회복의 역사를 일으킵니다.

프랑스의 사상가 시몬 베유(Simone Weil)는 이 우주에는 거대한 두 개의 힘이 있는데, ‘하나는 중력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은혜’라고 하였습니다. 중력은 그 자체로 점점 몸집을 불리기 위해 다른 물체를 끌어당기는데 인간에게도 같은 힘이 작용합니다. 인간은 외형적으로 자신을 확장하고 싶은 마음, 곧 다 자기의 것으로 끌어들이려는 ‘이기심’이라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는 이와 다릅니다. 은혜는 자기에게로 끌어당기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포용하며, 자신의 것을 나누고 베풀게 합니다. 자기중심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을 향한 배려와 사랑의 마음이 생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은혜를 알고 누리는 사람에게는 회복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은혜를 혼자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나누기 때문입니다. 은혜는 계속 증폭되어 나를 회복케 하고, 이 새롭게 하는 역사가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달됩니다. 그리고 그 전달됨 속에서 많은 이들이 하나님의 풍성한 회복과 생명의 역사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2절)라고 말합니다. 지금 우리 안에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먼저 은혜를 통한 변화와 회복, 생명의 역사를 누리고, 이를 이웃에게 흘려보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은혜의 역사와 나눔이 있으십니까? 날마다 은혜 안에서 새롭게 변하는 삶, 나아가 그 은혜를 나누는 삶이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고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히 누리고 있다는 표시입니다. 은혜의 능력과 역사를 통해 매일의 삶 가운데 참된 기쁨과 만족, 나눔이 흘러넘쳐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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