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현장
[ 찾아가는 인터뷰 11회 ] 서성훈 원로장로 (17교구)
2019년 10월 27일
광림교회 역사의 산증인, 서성훈 장로 평생 하나님과 교회만 섬겨
이득섭 기자 7sublee@naver.com
“과거를 돌아볼 때 가장 은혜로웠던 때는 첫째, 쌍림동 시절 어렵게 시유지 땅을 불하받아 그 위에 교회를 건축했을 때고, 둘째는 신사동으로 이전하여 천막을 치고 예배를 드릴 때였습니다.”
오는 11월 3일은 광림교회 창립 66주년 기념주일이다. 광림교회는 초대 민응식 목사가 ‘광희문교회’로 창립하였으며, 1971년 제5대 김선도 담임목사가 부임한 이후 교회 성장이 크게 이루어져 교회당을 새로 건축하게 되었다. 이 무렵 교회 명칭도 광림교회로 바뀌게 되었는데, 처음 있었던 광희동과 새로 교회가 들어선 쌍림동의 글자를 섞어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 광희문교회 시절부터 출석하여 누구보다 광림교회 역사를 잘 아는 서성훈 장로를 만나 지난날의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광림교회는 언제부터 나오게 되었습니까?
모태신앙으로 어머니가 광희문교회에 다녔고, 따라서 신앙생활 전부를 광림교회에서 보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젊은 시절 교회에서 한 일은?
대학생 때 주일학교 교사, 성가대, 청년부 활동을 하였는데, 당시 김선도 목사님이 솔선수범하면서 교회를 잘 이끌었고, 교인들도 모든 일에 열심으로 잘 따라주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주일학교가 오후 늦게까지 있었고, 통금이 가까이 될 때까지 젊은이들이 빵집에 모여 교회 일을 의논했던 때가 기억납니다.
쌍림동 시절의 광림교회를 이야기한다면?
김선도 목사님이 부임했을 때, 교인수는 200명 남짓이었는데, 매주 예배 후에 두 사람이 짝을 이루어 전도를 하였고, 그 결과 교인수가 500명, 1천명, 2천명으로 급격히 늘게 되었습니다. 당시 교회는 철근이 들어가지 않는 벽돌로만 지어져, 더 이상 교인이 늘어나면 붕괴위험이 발생할 수 있어 교회를 이전키로 하였습니다.
과거를 돌아볼 때 가장 은혜로웠던 때는?
첫째는 쌍림동 시절 어렵게 시유지 땅을 불하받아 그 위에 교회를 건축했을 때고, 둘째는 신사동으로 이전하여 천막을 치고 예배를 드릴 때였습니다. 당시 비포장 도로에다 버스도 다니지 않아 과연 교인들이 찾아올까 걱정했는데, 예배가 시작될 무렵 멀리서 먼지를 날리며 많은 교인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셋째는 신사동에 와서 교회 입당예배는 드렸지만, 교회에 빚이 있으면 봉헌식을 할 수 없는데, 이를 다 갚고 봉헌예배를 드렸을 때가 기억에 남습니다.
광림교회에서 어떤 봉사를 하셨습니까?
교사 봉사로 30년 가까이 했으며, 빌레몬선교회(현 실업인선교회), 누가선교회(현 의료선교회), 빌립선교회(현 교수선교회) 및 매스컴선교회 창설에도 관여했습니다. 건축위원장 시절 교육관, 광림수도원 및 사랑의 집을 봉헌하였습니다. 평생 봉사할 수 있도록 인도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