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특집] 김선도 감독의 아흔 인생과 목회 신학 이야기.
2021년 4월 25일
'장천울림'(3)
박관순 사모
박관순 사모는 김선도 목사를 만나 평생 하나님을 섬기며 살겠다는 다짐으로 1960년 부부의 연을 맺었다. 60여 년간 김선도 목사와 러닝메이트로 지내오며 “예수님 덕분에 그 많은 영혼을 구원하고, 개인적으로도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 만난 김선도 목사를 통해서 전도하게 되고, 목회에 성령 충만함을 받고, 하나님의 교회를 성장시키게 된 것이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서울신학대학교 명예 신학박사, 광림교회 여선교회총연합회 고문, 광림복지재단 이사, 서우장학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아래는 박관순 사모의 글 요약본이다.
처음 만난 김선도 전도사는 초지일관 하나님과 교회, 그리고 교인들밖에 모르는 목사, 생각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 추구하는 것이나 목적하는 것 모두가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일제 강점기의 식민통치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자라온 환경이었지만 남편은 자신의 유년 시절을 두고 ‘영적으로 너무나 풍요로웠노라’고 말씀하곤 한다. 지금도 시절을 탓하는 법이 없다. 매번 긍정의 요소를 찾아내고 하나님의 섭리를 기필코 발견해 내고야 마는 사람이다.
오직 순종으로 운명을 뒤집고 사명으로 살다나는 서울대학교 간호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며 병원업무를 마친 새벽이면 반드시 새벽예배를 드리고 난후에 귀가했다. 철원에 갔을 때에도 새벽예배에 참석했다. 그리고 그 새벽에 시부모님을 만났다. 시부모님의 소개로 만난 우리는 남편의 은사이신 홍현설 목사님을 주례목사님으로 모시고 아현감리교회에서 혼례를 올렸다. 신혼살림을 시작한 집은 교회다락방이었다. 처음 가서 보니까 몇 평 남짓한 다락방 안에는 의료기기, 약병 등으로 한가득 채워져 있었다. 목회의 길에 들어서기 전에 차렸던 병원에서 그대로 옮겨다 둔 것이었다.
신기하게도 그런 풍경이 내겐 낯설지도, 남루해 보이지도 않았다.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남편의 모습에 긍휼한 마음이 솟아 나왔고, 여기서 시작하자고 외치는 듯 한 진정어린 속내가 들여다보여 내심 감사했다. 다락방에서 첫발을 내디디면서 알게 되었다. ‘내 남편과의 신혼살림은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축복의 시작이로구나’ 라는 것을 말이다.
영혼의 허기를 채우시는 불성령의 체험
나는 고등학교 3학년시절에 불성령을 한차례 체험했다. 그리고 훗날 미숫가루를 타고 수유통을 만들어서 포대기에 아들을 둘러업고 부흥회에 참석했는데 그 자리에서 두 번째로 불성령을 받았다. 늘 수많은 책에 파묻혀 있던 남편도 영혼의 허기를 느끼긴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한마디 말도 없이 어딘가로 갔다 치면 어김없이 기도원에 있었다. 기도원이란 기도원은 다 찾아다니며 기도했다. 우리 부부는 아이들을 재우고 깊은 밤중에 교회 뒷동산의 공동묘지에 올라가서 함께 기도하기도 했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역전시키는 전적인 투신
남편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있는 기간 동안 우리 가족은 셋방살이를 했다. 집주인의 잔소리에 더해서 후생주택을 구입하며 핍박도 많이 받았다. 그런 연후에 광림교회에 부임하고 보니까 안타까운 현실이 있었다. 재정적으로는 많은 빚이 있었고, 교회건물은 노후해서 손봐야 할 곳이 많았다. 교인들은 무슨 말을 해도 불가능이요, 무슨 일을 해도 불가능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남편은 불가능을 뒤엎고,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들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는 말씀을 강력히 외치기 시작했다. 15평 남짓했던 후생주택도 아낌없이 팔아 교회의 빚을 갚는 데 모두 바쳤다. 누구보다 앞서 스스로가 투신하니까, 남편 한 사람이 움직이면 모든 성도들이 따라왔다. 한 사람의 헌신과 확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남편은 목회의 모든 순간 행함으로 증명하고 있었다.
폭넓은 포용력과 과감한 결단력의 조화
남편은 오직 오늘의 사람이다. 언제나 오늘을 마지막처럼 살고 있다. 미국 유학을 가서도 오늘이었고, 광림교회에서도 늘 오늘을 살고 있다. 남편은 듣는데 은혜가 있는 사람이다.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말하는 사람에게 아쉬움이 남지 않을 정도로 전부 듣는다. 예수님이 남편의 중심에 계시고, 자신의 생활과 마음 전부를 교인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지극정성으로 전부 쏟아 넣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나에게도 수미일관(首尾一貫) 똑같다. 여전히 내 남편은 나를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지만, 아내인 나의 말에는 일 점도 흔들림이 없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남편이 나를 의지하는 때가 있으니 바로 기도하는 순간이다.
낡은 교회가 허물어지고 오랜 구습도 함께 무너져 가다
남편은 설교 단상에 올라가면 성령의 두루마기를 휘감은 듯 강력하게 확신 있는 비전을 선포하고 성도들의 잠든 영혼을 깨우고, 적극적으로 변화시켰다. 평일에는 전도에 전도, 또 전도를 했다. 500석의 예배당에 150여 명이 출석하던 교회가 어느새 교인들이 500명을 넘어섰고, 3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1천 명을 훌쩍 넘어서게 되었다. 주일이면 새 가족들을 맞이하며 행복한 분주함을 누리게 되었다. 성령의 바람이 뜨겁게 몰아치자 교회가 급변하기 시작했고, 지은 지 20년 가까운 세월동안 낡고 부서지기 시작한 교회건물을 보면서 건축을 서둘러야 한다고 결정했다. 장로님들 몇 분씩 짝을 지어 기도하며 강남의 배 밭 몇 필지를 둘러보며 마음을 모았다. 남편의 설교에 은혜 받은 교인들이 부흥의 현실을 맞이하니까 너나없이 자발적으로 교회건축에 팔을 걷어 붙였다.
한 손에는 성경을, 그 어깨에는 쌀자루를 짊어진 목사
남편 목회의 훌륭한 면 가운데 하나가 시간을 초 단위로 쪼개고 또 쪼개면서 사용하는 것이다. 남편은 아낌없이, 그리고 남김없이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교인들을 위해서 사용했다.
남편은 교인들에게 그렇게도 후하다. 어떤 사람이 방문해도 그 분 그림자가 사라지기까지 바라보면서 기도를 한다. 몇 차례씩이나 작별인사를 나누었으면서도 또 인사하고 다시 손을 잡는다. 교인들을 영적인 자녀로 대하고 섬기는 남편의 모습이 어떤 경우에는 이삭을 바라보는 아브라함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때로는 우리 가족 쌀독이 텅텅 비어 가는 것은 전혀 모르면서 교인 가정의 수저 개수를 모르면 불같이 역정을 내곤 했다. 칼 바르트는 “목사는 한 손에는 성경을, 다른 한 손에는 신문을 반드시 들고 있어야 한다”고 했다는데, 내 남편은 한 손에는 성경을 그리고 그 어깨에는 교인들을 위한 쌀자루를 짊어지고 목회를 했다.
눈물 쏟으며 기도하는 아버지이자 대제사장
자식에 대한 사랑처럼 감리교 후배 목사들에 대한 사랑과 정성도 자식 사랑 그 이상이었다. 감독직을 수행하는 모든 기간에는, 희생 없는 예배는 죄라면서 스스로 헌신을 재촉하며 일거수일투족 겸손에 힘썼고 감리교를 위해 무얼 희생할까 골몰하기만 했다. 자녀들은 물론이고 그 많은 목회의 후배들은 내 남편에게서 온화한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분명한 사실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향해서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눈물로 기도하신 것처럼 남편도 새벽제단에 엎드려 무르팍 쓸어가면서 한 사람을 위하여 기도의 눈물을 훔칠 줄 아는 아버지요, 목사라는 것이다.
남편과 나는 평생을 마른수건을 적셔가며 기도의 눈물을 많이도 쏟았다. 어린아이가 엄마한테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며 의지하듯 기도했다. 하나님이 응답해 주셨고 기도를 통해서 추위를 이겨낸 꽃을 피웠고 무더위를 견뎌낸 열매를 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