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림스토리
아펜젤러 선교사의 평양 선교여행
2022년 1월 9일
아펜젤러 선교사 - 4
권순정 목사(목회선교지원실)
1887년 아펜젤러는 당시 조선의 상황을 파악하고 교회를 세울 곳을 답사하고자 선교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1887년 4월 13일, 세관에서 일하는 헌트 씨와 함께 평양으로 향했고, 서울을 떠난 지 11일 만에 평양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조선에는 철도가 없었기 때문에 선교사들의 이동수단은 가마나 말, 또는 조랑말이었습니다. 가마는 보통 네 사람이 한 조를 이루어 두 사람씩 교대했습니다. 가마를 메는 사람 중에는 얘기꾼이 있어서 여행이 지루하지 않게 재미있는 얘기를 했고, 때로는 허풍을 떨어서 폭소를 자아냈다고 합니다. 보통 외교관들은 가마를 많이 이용했습니다. 그러나 아펜젤러는 업무를 위해 가끔 가마를 탔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고 합니다. 가마꾼인 사람을 동물 취급하는 것이나 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펜젤러는 가마를 타지 않고 말이나 조랑말을 탔다고 합니다.
평양으로 가는 길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대동강에서는 강에 다리가 없어 배로 건너야 했고, 배에 오른 말이 요동을 쳐서 배가 뒤집힐 뻔하기도 했습니다. 여정 중에 숙박한 여관에서는 빈대와 벼룩에 시달렸습니다. 평양에 도착한 아펜젤러 일행은 평양 감사의 관저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아펜젤러 일행은 감사의 호의로 평양 거리를 안전하게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아펜젤러는 평양을 돌아본 후 백성의 어려운 삶과 도덕적인 타락, 빈부격차 등 조선의 실상과 백성의 삶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며 선교의 방향을 생각했습니다.
아펜젤러는 평양을 방문한 첫 번째 선교사로 이후 언더우드 선교사와 함께 평양을 방문하기도 했으며, 1889년에 스크랜턴과 함께 세 번째 평양을 방문한 후, 의주 출신 매서인 한 사람을 평양에 파송했습니다. 이 매서인이 평양의 첫 한국인 개신교 전도인이었습니다. 이후 감리교회와 장로교회 외 많은 교파도 평양지역 선교에 힘을 쏟았고, 선교 초기부터 연합 사업이 잘 이루어졌습니다.
아펜젤러로부터 시작된 평양 선교는 많은 열매를 맺고 제2의 예루살렘이라는 별명까지 얻게 되었지만, 훗날 공산화되고 전쟁을 겪으며 많은 감리교 지도자와 성도의 수난과 희생도 뒤따랐습니다. 해방 후 월남한 평양 감리교인을 중심으로 남산교회, 시온교회 등의 교회를 서울에 세웠으며, 서부연회가 재건되기도 했습니다.
“내가 가장 바라는 소원은 마을과 시내 곳곳에서 예수님을 전하는 것이다. 복음이 자유롭게 선포되는 날은 아직 오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오게 되리라. 우리 기독 학생들이 이 나라 곳곳에 흩어져 넘쳐나게 되면 이 나라 전체에 좋은 영향력을 미치게 될 것임을 알 수 있다.” - 헨리 아펜젤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