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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림의 강단

믿음으로 용서하라

2023년 4월 9일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 7:60)

스데반은 초대교회의 일곱 집사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행 6:15). 그는 매우 온유하고 천사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무엇보다 용서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은 스데반이 말씀을 전하는 것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성 밖으로 끌어내어 돌로 쳐 죽였습니다. 성경은 스데반의 최후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행 7:59~60).
스데반은 죽음의 순간까지도 자신을 돌로 쳐 죽이는 자들을 용서했습니다. 더 나아가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60절) 라고 기도하며 그들이 용서받을 수 있기를 간구했습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변화될 가능성을 믿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지금 자신에게 돌을 던지는 자들도 언젠가는 복음을 받아들이고 변화될 가능성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 믿음은 사랑에서 오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이 용서를 불러오며 그 사람의 가능성을 믿게 해주는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한다면,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용서의 마음이 없다면 먼저 하나님께 사랑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스데반의 마지막 기도를 묵상하며, 다른 사람을 용서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용서받기를 중보하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시온 챌린지 아이들 만나길 바라는 예수님 마음 담아

사도행전 7:54~60
54.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55.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 57.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58.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59.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 광림교회 담임목사 김 정 석
    kwanglim-sp@hanmail.net
첫째, 용서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잘못된 교리를 전하는 거짓 선지자는 돌로 쳐 죽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적법한 절차가 필요했습니다. 증인들이 있어야 했고 재판의 과정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의 죽음에는 모든 과정들이 무시되었습니다. 군중들은 스데반의 말에 격노했고 순식간에 매우 폭력적으로 변했습니다.
격노한 그들은 거룩한 예루살렘이 거짓 선지자에 의해 더렵혀지지 않아야 한다는 이유로 스데반을 성 밖으로 내치고 그를 돌로 쳐 죽입니다. 58절에는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스데반에게 더 무겁고 큰 돌을 던지기 위해서였고, 또 하나는 이 모든 일의 책임이 사울이라는 청년에게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이 모든 일을 뒤에서 조종하고 사람들을 선동한 것이 사울이었을 것입니다.
스데반은 죽어가면서도 자신에게 돌 던지는 사람들, 이 모든 일의 주동자인 사울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자기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맡기신 예수님을 따라 자신의 영혼을 주님께 맡깁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는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예수님께 맡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감정의 끈을 잡고 원망하고 미워하는 삶을 살고 있다면 용서의 참 자유를 느낄 수 없을 것입니다.
심리학자 딕 티비츠(Dick Tibbits)는 용서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용서는 당신을 다시 삶의 운전석에 앉게 해준다. 용서는 틀을 다시 짜서 당신의 삶의 이야기를 바꿀 수 있게 해준다. 무엇보다도 용서는 당신을 치료한다. 용서는 과거의 상황이 당신의 현재를 지배하지 않도록 가르친다.”
스데반은 과거나 현재에 사로잡혀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도 주님께 소망을 두고 다른 사람들을 용서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위해 중보했습니다. 이는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길 때 가능한 일입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주님께 맡기십시오. 그리고 그를 위해 기도할 때 우리 안에 참 평안과 자유가 넘쳐나게 될 줄 믿습니다.

둘째, 용서할 수 있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스데반은 말씀을 전하다가 순교했습니다. 그는 많은 군중들 앞에서 성 밖으로 끌려 나가는 수모를 당했습니다. 그의 사회적인 지위와 관계성이 파괴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후 그들은 스데반을 향해 돌을 던지기 시작합니다. 이제는 그의 생명이 파괴되는 순간입니다. 왜 스데반을 반대했을까요? 스데반이 전하는 말씀을 듣고 마음이 찔렸기 때문입니다. 즉 죄책감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더 이상 죄책감을 느끼지 않기 위해 스데반을 죽인 것입니다. 그들은 죄책감을 느끼게 한 스데반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스데반이 사라진다고 그들 마음속에 있던 죄책감도 사라질까요?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죄를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스데반은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이 용서가 필요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그는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진정한 주님의 제자는 용서하지 못할 상황 앞에서도 무릎을 꿇습니다. 죄 뒤에 가려진 연약한 영혼을 보기 때문입니다. 또한 나 자신도 연약한 영혼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남을 위해 용서의 마음을 품을 수 있다는 것, 더 나아가 중보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큰 축복입니다. 스데반이 축복된 인생이었던 이유는 그의 사역이나, 순교 때문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중보하는 인생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남을 용서하고 축복하며 중보하는 복된 인생을 살아가길 위해 기도합시다.

셋째, 용서는 가장 아름다운 것입니다.

스데반이 용서한 사람들 가운데 ‘사울’이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매우 완악한 핍박자였습니다. 그는 그가 하는 일이 하나님을 위해 또 민족을 위한 것이라는 확신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핍박하였고, 스데반과 같은 사람들을 죽이는데 앞장섰습니다. 스데반의 순교가 청년 사울이 사도 바울로 변화되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없지만,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스데반의 중보하는 기도를 들으시고, 그 현장에 있던 바울을 변화시켜 주님의 도구로 사용하신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성서학자들은 초대교회는 스데반을 잃고 바울을 얻었다고 합니다. 스데반을 잃은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의 순교를 통해 청년 사울이 회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의 최후는 비참했지만, 그의 최후는 가장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용서와 중보기도가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도 알게 해주었습니다. 자신이 죽음으로 다른 사람이 새로운 생명과 사명 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스데반의 죽음은 최후가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었습니다.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은 “용서는 신선한 시작이며, 새로운 출발에 필요한 분위기를 창출하는 매체다”라고 했습니다. 용서는 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모두에게 다시 시작하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용서는 성숙한 신앙인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것입니다. 용서는 단절되었던 것, 분열되었던 것, 미워하고 질투하며 시기하는 모든 것들을 다시 새롭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가장 아름다운 것 입니다. 오늘도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주님께 구하십시오. 다시 시작하게 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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