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현장
한국인보다 한국인을 더 사랑한 호머 헐버트 선교사 - 1
2024년 3월 10일
한국감리교회를 빛낸 해외선교사 (19)
권순정 목사(목회선교지원실)
호머 베절릴 헐버트 선교사 (1)
호머 베절릴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 1863년 1월 26일 ~ 1949년 8월 5일)는 미국 감리교회의 선교사로 그의 아버지는 스리랑카와 인도에서 복음을 전한 선교사였으며,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교육자 집안으로 헐버트에게 어려서부터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습니다.
1884년 조선 정부는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영어와 신학문을 가르치기 위해 근대식 학교를 설립하기로 결의하고 미국 국무부에 세 명의 교사 파견을 요청하였습니다. 이 때 헐버트는 조선에 가겠냐는 아버지의 제안에 즉시 가기로 동의했습니다. 그러나 1884년 말 조선에 정변이 발생하여 학교 설립은 취소되었습니다. 헐버트는 이 소식에 실망했지만, 다시 기회를 기다리며 유니언 신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그곳에서도 조선에 대한 관심을 갖고 공부하다가 1886년 봄 다시 학교설립을 추진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1886년 5월 6일 뉴욕을 출발하여 샌프란시스코로 향했으며, 증기선을 타고 일본 요코하마와 나가사키를 거쳐 7월 5일 조선의 제물포항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1886년 9월 23일 개교한 조선 최초의 국립 근대식 학교인 육영공원(育英公院)의 교사로 일을 시작했으며, 언어학자로, 영어 교사로, 독립신문 발행을 도운 언론인으로, 한국어 연구와 보급에 앞장선 한글 학자로 귀한 일을 감당했습니다. 또한 고종을 도와 대한제국 말기 국원 수로를 적극 도왔으며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지원한 독립운동가였습니다.
그는 벙커(Bunker), 길모어(Gilmore)와 함께 23세 때 조선 땅을 밟았습니다. 당시 헐버트는 영어와 지리를 가르쳤는데, 입국 후 바로 시작한 것이 한국어 공부였습니다. 학생들을 제대로 가르치고 한국인들과 소통하기 위해 한국어 공부가 필수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회고록에 남기길 그는 한글을 배운 지 4일 만에 읽고 쓸 수 있었으며, 3년 정도 후에는 한글로 책을 저술할 정도의 실력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고종은 육영공원 학생들을 궁으로 불러 영어 시험을 치르도록 했는데, 고종이 직접 영어 문제를 읽기도 했습니다. 고종은 영어를 몰랐지만 한글로 발음이 표기된 것을 보고 영어 문제를 냈던 것입니다. 그 때 헐버트는 한글의 우수성을 깨닫고 한글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1889년 최초의 순한글 지리 교과서인 [사민필지]를 저술하였으며 한자 대신 한글애용을 권장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이런 조선 사랑에도 불구하고 1891년 조선 정부가 재정상의 이유로 육영공원 운영을 축소하자 그는 교사직을 사임하고 미국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하지만 미국에 돌아간 후에도 한글과 한국 문화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였습니다.
이후 1893년 10월 14일 선교사의 자격으로 다시 조선에 입국하여 배재학당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이 때 그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이 서재필, 이승만, 주시경 등입니다. 헐버트는 조선에 근대 교육의 초석을 놓은 선교자였으며, 민족의 많은 지도자를 키워낸 스승이자, 든든한 독립운동의 후원자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