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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행하심을 기록하는 공간

아펜젤러 선교사

한국감리교회를 빛낸 해외선교사 3

조선에 온 첫 감리회 선교사, 헨리G.아펜젤러

“우리는 부활주일에 이곳에 왔습니다. 부활절에 죽음의 장벽들을 산산이 부순 주님, 이 백성들을 속박하는 굴레들을 깨뜨리시오며,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빛과 자유로 인도하소서.”
1885년 4월 5일 아펜젤러 선교사의 기도문

미국 감리교회에서 한국으로 파송된 첫 선교사 헨리G.아펜젤러는 부인과 장로교회 선교사인 언더우드와 함께 1885년 4월 5일 부활절에 인천 제물포에 상륙했다. 이때 아펜젤러는 27세였다.
당시 갑신정변으로 인해 서울의 분위기는 평온하지 못했다. 미국 공사는 자국민의 신변보호를 위해 여성들이 서울에 오는 것을 삼가라고 했기에, 총각이었던 언더우드는 서울로 올 수 있었지만, 아펜젤러 내외는 인천에 일주일간 머물다가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 후 두 달 보름이 지나서야 서울의 정세가 안정되었고, 일본에 머물던 의료선교사 스크랜턴의 가족들과 함께 6월 20일 인천항으로 재입국했다. 스크랜턴 가족은 바로 서울로 상경한 반면, 아펜젤러 선교사는 서울의 주택 개조와 수리에 시간이 많이 걸려 인천에 28일간 더 머물러야 했다.
결국 1885년 7월 19일 서울에 도착하여 선교를 시작하게 되었다.
미국의 랭커스터에서 시작된 아펜젤러의 선교여행은 세인트루이스를 거쳐 샌프란시스코까지, 그리고 1885년 2월 3일 샌프란시스코를 출항하여 태평양을 건너 2월 27일 일본 요코하마까지, 그리고 나가사키 항을 거쳐 인천으로,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가 재입국하여 결국 그해 7월 19일이 되어서야 서울에 도착했으니, 미국에서 한국에 오기까지 무려 5개월간의 여행을 한 것이다.

이처럼, 선교의 시작은 순탄치 않았다. 그러나 그는 한국 감리교회의 개척자요 선구자였으며, 순직하기까지 생명을 다해 영혼을 구원한 위대한 선교사가 되었다.

해외선교사 G.아펜젤러
아펜젤러 선교사의 교육사업
해외선교사 G.아펜젤러의 교육사업

1885년 7월 19일에야 서울에 입성할 수 있었던 아펜젤러 부부는 자신들보다 앞서 5월 1일 서울에 도착한 의사 스크랜턴 선교사의 도움을 얻어 서울에 정착했다. 스크랜턴은 짧은 시간에 조선의 사정과 서울의 분위기를 파악하고 아펜젤러에게 정보를 제공했다. 그들은 후트 공사(한국 주재 초대 미국 공사)를 통해 교육과 의료사업에 관심이 많았던 고종황제의 관심을 얻을 수 있었다.

후트 공사가 고종황제에게 아펜젤러가 학교를 설립해 영어를 가르치기 원한다는 사실을 알렸고, 고종황제는 소신대로 그 일을 진행하라고 했다. 기쁜 마음으로 아펜젤러는 본격적인 교육 사업에 착수했고, 서울에 도착한지 1년이 못되어 교육 사업을 시작할 수 있는 허가를 얻게 된 것이다.
아펜젤러가 조선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최우선의 목표였지만, 그 전에 교육사업에 혼신을 쏟았다. 그 이유는 조선 정부가 허락한 사업은 교육과 의료분야였기 때문이다. 그는 선교의 자유가 없는 상황에서 학교를 통해 선교의 문을 열고자 한 것이다. 기독교교육과 영어교육을 통해 조선의 복음화뿐만 아니라 나라를 위해 봉사하는 유능한 기독교지도자를 양성하고자 했던 것이다.

아펜젤러는 조정의 긍정적인 인식과 관심 속에서 교육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으며, 당시 교육에 열의가 있던 사람들이 자신의 집을 내어주면서까지 아펜젤러의 교육 사업에 호응하였다. 마침 조선은 문호를 개방했기 때문에 영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많이 필요했고, 아펜젤러의 학생들이 관료로 채용되며 영어를 잘하는 것이 관직에 나아가는 지름길이 되었던 것이다. 아펜젤러가 세운 학교에 고종황제는 ‘유능한 인재를 기르는 학교’라는 뜻의 ‘배재학당 (培材學堂)’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1887년에는 정동 언덕에 르네상스식 1층 건물로 강당과 도서실, 학당실과 교실을 지었고, 이 건물은 한국 최초의 근대식 건물이었다.
배재학당은 교육의 기회가 없었던 조선인들에게 서구의 과학과 문학을 배울 수 있는 배움의 터였으며, 동시에 관직을 얻는 길이었기 때문에 매우 인기가 있었으며, 훗날 배재학당은 조선의 근대화와 독립운동의 중심지로서 한국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한국 최초의 감리교회 벧엘교회(Bethel Church)

1887년 정동 언덕에 르네상스식으로 지은 배재학당 본관은 한국 최초의 근대식 건물로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습니다. 이곳은 서구의 과학과 학문을 접할 수 있는 곳이었으며, 자연스럽게 기독교적 가치관을 전하는 선교 학교로서의 역할도 했습니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직접적으로 성경을 가르칠 수 있는 곳이 필요했습니다.
1887년 4월 4일 열린 선교사월례회에서 서울 중심부에 성경공부를 위한 장소를 구입하기로 결의하고, 9월에 작은 집을 구입한 뒤, 10월 9일 이곳에서 처음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때 4명의 조선 사람이 예배에 참석했는데, 이 모임이 지금 정동교회의 시작입니다.
아펜젤러는 처음 교회를 세우며 야곱의 비전을 생각했고, 교회 이름을 벧엘교회라 명명했습니다. 아펜젤러는 한국어를 쓰기위해 노력했으며, 첫 세례식 때도 한국어로 집례했으며, 첫 성탄절 예배 때도 ‘그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라는 제목으로 한국어 설교를 했습니다.
뉴욕의 유니온신학교에 보관중인 아펜젤러의 수첩을 보면 그가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한국어 단어를 수첩에 적고 매일 체크하며 외웠으며, 모르는 단어가 있을 때마다 수첩에 적고, 그 뜻을 한국 사람에게 물어봤습니다. 그는 가급적 한국어를 쓰기 위해 항상 노력했습니다.

이러한 아펜젤러의 노력으로 배움의 혜택 밖에 있었던 많은 여성들이 교회에 와서 외국인이 하는 서툰 한국어를 통해서도 많은 은혜를 받았으며, 이후 벧엘교회를 중심으로 전도의 열기가 확산되어 수많은 젊은 학생들이 회심하였고, 서양학문과 복음의 중심지가 된 정동에서 교파를 초월한 연합예배와 기도회 등이 연합으로 진행되었습니다.

현재 정동교회, 즉 벧엘교회의 성전건축은 1895년 8월 7일에 시작되었으며, 한 달 후인 9월 9일에 거행된 정초식에는 조정의 법무대신 서광범과 외무협판 윤치호 등이 참석할 정도로 조선 사회에서도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조선 역사상 남녀가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였고, 함께 고개 숙여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수천 년 이어 내려온 조선 사회의 봉건성이 무너지는 자리였습니다.

감리교회 벧엘교회
아펜젤러 선교사의 평양 선교여행
감리교회 벧엘교회

1887년 아펜젤러는 당시 조선의 상황을 파악하고 교회를 세울 곳을 답사하고자 선교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1887년 4월 13일, 세관에서 일하는 헌트 씨와 함께 평양으로 향했고, 서울을 떠난 지 11일 만에 평양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조선에는 철도가 없었기 때문에 선교사들의 이동수단은 가마나 말, 또는 조랑말이었습니다. 가마는 보통 네 사람이 한 조를 이루어 두 사람씩 교대했습니다. 가마를 메는 사람 중에는 얘기꾼이 있어서 여행이 지루하지 않게 재미있는 얘기를 했고, 때로는 허풍을 떨어서 폭소를 자아냈다고 합니다. 보통 외교관들은 가마를 많이 이용했습니다.

그러나 아펜젤러는 업무를 위해 가끔 가마를 탔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고 합니다.

가마꾼인 사람을 동물 취급하는 것이나 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펜젤러는 가마를 타지 않고 말이나 조랑말을 탔다고 합니다.
평양으로 가는 길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대동강에서는 강에 다리가 없어 배로 건너야 했고, 배에 오른 말이 요동을 쳐서 배가 뒤집힐 뻔하기도 했습니다. 여정 중에 숙박한 여관에서는 빈대와 벼룩에 시달렸습니다. 평양에 도착한 아펜젤러 일행은 평양 감사의 관저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아펜젤러 일행은 감사의 호의로 평양 거리를 안전하게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아펜젤러는 평양을 돌아본 후 백성의 어려운 삶과 도덕적인 타락, 빈부격차 등 조선의 실상과 백성의 삶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며 선교의 방향을 생각했습니다.

아펜젤러는 평양을 방문한 첫 번째 선교사로 이후 언더우드 선교사와 함께 평양을 방문하기도 했으며, 1889년에 스크랜턴과 함께 세 번째 평양을 방문한 후, 의주 출신 매서인 한 사람을 평양에 파송했습니다. 이 매서인이 평양의 첫 한국인 개신교 전도인이었습니다. 이후 감리교회와 장로교회 외 많은 교파도 평양지역 선교에 힘을 쏟았고, 선교 초기부터 연합 사업이 잘 이루어졌습니다. 아펜젤러로부터 시작된 평양 선교는 많은 열매를 맺고 제2의 예루살렘이라는 별명까지 얻게 되었지만, 훗날 공산화되고 전쟁을 겪으며 많은 감리교 지도자와 성도의 수난과 희생도 뒤따랐습니다. 해방 후 월남한 평양 감리교인을 중심으로 남산교회, 시온교회 등의 교회를 서울에 세웠으며, 서부연회가 재건되기도 했습니다.

“내가 가장 바라는 소원은 마을과 시내 곳곳에서 예수님을 전하는 것이다. 복음이 자유롭게 선포되는 날은 아직 오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오게 되리라. 우리 기독 학생들이 이 나라 곳곳에 흩어져 넘쳐나게 되면 이 나라 전체에 좋은 영향력을 미치게 될 것임을 알 수 있다.”
- 헨리 아펜젤러

아펜젤러 선교사의 조선인 사랑과 성경번역

아펜젤러 선교사는 매우 사교적이었고 헌신적이었습니다. 그는 사람을 만나 사귀고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자라온 문화와 전혀 다른 조선 땅에서 이방인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아펜젤러 선교사의 가족은 마치 투명한 어항에 있는 물고기처럼, 그들의 행동 하나 하나가 사람들의 관심거리였으며, 때로는 오해와 갈등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창호지가 아닌 유리창이 있는 선교사의 주택 밖에서 아이나 어른이나 할 것 없이 유리창에 얼굴을 맞대고 집안의 신기한 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아펜젤러 선교사 가족은 자신들의 행동이 혹시 복음을 전하는 것에 방해가 되지 않을까 늘 조심하면서 살았다고 합니다.

아펜젤러는 먼저 조선인을 이해하기 위해 조선말 배우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았습니다. 특별히 그는 언어에 재능이 많았는데, 독일계 어머니의 영향으로 독일어도 모국어처럼 할 수 있었으며, 영어는 물론 프랑스어도 잘했으며, 히브리어와 헬라어에도 능통했습니다. 언어에 관심과 재능이 많았던 그는 한국어를 배워 성경번역을 위해 매진했습니다. 1887년 성탄절에 처음 한국어로 설교했으며, 1890년에는 로스역 성경 개정판인 ‘누가복음젼’을 출판하고, 1892년에는 ‘마태복음젼’을 출판했습니다. 1893년 장로교회의 언더우드 선교사를 비롯한 다섯 명이 성경번역자회를 구성하고, 마침내 1900년 한글 신약전서를 완성하여 정동제일교회에서 완역된 신약성서를 봉헌했습니다. 그는 1885년 조선에 와서 1902년까지 17년간 밤낮없이 조선인을 위해,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젊음과 생명을 바쳤습니다.

아펜젤러 가족사진, 신약전셔
아펜젤러 선교사의 문서선교
감리교회 문서선교

아펜젤러 선교사는 배재학당을 개교한 후 출판과 문서선교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고 1887년 말 올링거(Franklin Ohlinger) 선교사를 조선에 초청하였습니다. 올링거 선교사는 조선에 파송되기 전 중국에서 16년간 선교사로 활동했으며, 출판과 교육 분야에서 많은 경험이 있었습니다. 올링거 선교사가 조선에 왔을 때, 그의 나이는 42세였기 때문에 20대 청년선교사였던 아펜젤러나 언더우드에게는 많은 경험을 전수해 줄 수 있었고, 그의 합류로 인해 많은 선교 사역들이 시작되었습니다. 아펜젤러가 특별히 올링거 선교사를 초청한 데에는 그의 선교 경험을 배우고 동역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펜젤러와 올링거 선교사는 먼저 배재학당 지하에 우리나라 최초의 인쇄소인 삼문활판소를 설립했습니다. 삼문의 의미는 국문, 한문, 영문의 3가지 활자를 갖추었다는 뜻입니다. 이칭으로 삼문출판사, 미이미활판소(美以美活版所)라 불리기도 했는데, ‘미이미’는 ‘MEM(Methodist Episcopal Mission)’의 음역으로 우리말로는 ‘감리교활판소’라는 의미입니다. 삼문활판소(출판사)는 얼마 후 배재학당의 본관 서쪽 뒤편에 별도의 건물을 지어 인쇄소로 사용하였습니다.
아펜젤러 선교사는 책을 만드는 일을 학비가 없거나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맡겨서 자립정신을 길러주었으며, 또 실습을 통해 인쇄술을 배울 수 있는 기회로 제공했습니다. 대표적으로 한글학자 주시경도 배재학당 학생 시절 삼문출판사에서 일하며 학비를 벌었습니다.
삼문출판사에서는 정기 간행물인 ‘The Korean Repository’, ‘죠션 그리스도인 회보’, ‘그리스도신문’, ‘신학월보’ 등이 출판되었으며, 배재학당의 교과서는 물론 다른 학교의 교과서도 출판되었습니다. 기독교 서적으로는 아펜젤러가 쓴 전도용 문서인 ‘성교촬요’, 교리서인 ‘미이미교회강례’, 게일 선교사가 번역한 ‘천로역정’ 등이 출판되었으며, 신약성경 번역본을 출판하기도 했습니다. 삼문출판사는 교파의 구별 없이 복음을 전파하고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 많은 기독교 언론지, 서적, 성경과 찬송가를 출판했으며, 특별히 ‘독립신문’이 이곳에서 인쇄되었습니다.

아펜젤러의 복음전파와 조선의 근대화를 위한 선구자적인 시각은 출판과 문서선교를 통해 더욱 구체화 되었으며, 성서번역과 여러 출판물들을 통해 실제적인 열매를 맺었습니다. 또한, 영문 잡지와 여러 보고서를 통해 조선의 상황을 세계에 알리는데 큰 공헌을 했습니다.

아펜젤러 선교사의 순직

1885년 27세의 나이에 조선의 첫 선교사로 파송된 아펜젤러 목사(H. G. Appenzeller)는 목회자, 교육자, 출판사업가, 번역가 등 수많은 일들을 감당했으며, 조선의 복음화와 근대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1902년 6월 11일 전북 군산시 어청도 앞 바다에서 일어난 선박사고로 인해 44세의 나이에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알려진 바로는 일등석에 있던 아펜젤러 선교사는 삼등석에 있던 그의 조사인 조한규와 한 조선인 여학생을 구하기 위해 희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가 성서번역을 위해 선교 활동을 하던 중 순직했다는 것입니다.

아펜젤러는 언어에 뛰어난 능력이 있었고 고향에서는 번역가로 소개될 만큼 여러 언어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는 그런 능력으로 한국어를 빨리 습득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어 성경번역을 위해 온 정열을 쏟던 그는 성서번역자회의 ‘신약젼서’의 수정과 보완 작업에 참석하기 위해 인천에서 배를 타고 목포로 가던 중 다른 선박과 충돌해 사고를 당하게 된 것입니다. 당시에 레이놀즈 선교사가 목포에 있었기 때문에 함께 모여 번역작업을 하기 위해서 목포로 행했던 것입니다.
아펜젤러 선교사는 여러 연합기관에서 봉사했는데 그는 직책이나 지위를 생각하기보다는 언제나 낮은 자리에서 섬기는 일이 먼저였습니다. 그는 다른 위원들이 번역하지 못한 부분까지 맡아서 번역했으며 성서번역을 위해서라면 어디든 찾아갔습니다. 그 결과, 아펜젤러는 1890년 3월 <누가복음젼>, <보라달로마인셔> 3,000부씩을 삼문출판사에서 출간했습니다. <보라달로마인셔>는 아펜젤러와 스크랜튼이 로스의 로마서를 수정한 것입니다. (‘보라’는 ‘바울’의 중국식 번역) 1892년 1월 20일 아펜젤러 번역 <마태복음젼>이 임시역본으로 발행되었고, 1900년에는 신약전서 전체의 번역이 완료되어 출간되었습니다. 아펜젤러가 번역을 한 본문은 <마태복음>, <마가복음>, <고린도전·후서>입니다. 1900년 5월 5일 성서공회 주일, 아펜젤러는 정동교회에서 완성된 신약전서를 손에 들고 감격적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비록 그가 한국어 성서번역이 완성되는 것을 보지는 못했지만, 그의 헌신으로 인해 한국어 성서번역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음은 존스 선교사가 쓴 아펜젤러 선교사 순직 1주기 추도사의 일부 입니다.
“그는 교회에 충성을 다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임재와 주님의 무한한 영광 속에서 살았으며 매순간 그의 위대한 지도자에게 눈을 돌릴 때마다, 이렇게 외쳤습니다. ‘주여 앞장서옵소서, 제가 따르겠나이다. 진리와 충성으로 최후의 순간까지 따르겠나이다’.”

많은 사람들이 아펜젤러의 죽음을 안타까워했지만 그의 무덤은 세상에서 가장 큰 무덤이 되었으며, 그는 땅에 묻힌 것이 아니라 많은 한국인들과 동료 선교사들의 마음에 묻혔습니다. 올해는 그의 순직 120주년을 기념하는 뜻 깊은 해입니다.

아펜젤러 선교사가 탑승한 구마가와마루(The Kumagawa Maru) 증기선